아직까지도 오프로드를 달리기 위해 SUV를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제는 조금 더 높고 넓은 시야와 여유있는 실내공간을 위해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이에 맞춰 브랜드마다 다양한 크기, 사양의 제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사회초년생 시절이야 소형 SUV 정도면 충분하지만, 결혼을 하며 가족을 꾸리게 되면서부턴 더 큰 차를 찾게 되고 자녀가 성장하게 되면 이에 맞춰 차량도 점점 더 커지게 된다.
혼다의 라인업은 대부분 패밀리카의 역할을 소화할 수 있지만, 필요에 따라 가끔씩 5~6명 이상 탑승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선택지가 둘로 나뉜다. 미니밴 오딧세이거나, 준대형 SUV인 파일럿이다. 편의성과 스타일 중 무엇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선택지가 갈리는데, 최근에 새롭게 파일럿 블랙 에디션이 출시되어 차량을 받아 직접 살펴보았다.
지난 해 하반기에 세대교체를 맞이한 파일럿은 이전 스타일과 달리 떡 벌어진 덩치를 보여주는 디자인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곡선 위주의 이전 스타일과 달리 곳곳에서 직선과 각을 살린 디자인이 눈에 들어오는데, 덕분에 플래그십 모델다운 위엄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블랙 에디션에 걸맞게 차체 곳곳을 검정색으로 마무리했는데, 헤드라이트와 그릴 상단부를 이어지는 크롬 가니시마저도 블랙으로 처리하며 통일감을 부여했지만 엠블럼이나 레터링만큼은 본래의 색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눈에 잘 띄도록 했다.
측면에서는 창문 주변 장식이나 휠 역시 검정색으로 처리하면서도 내부 로고만 원래의 색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고, 후면에서는 브랜드 엠블럼과 머플리 가니시를 뺀 나머지를 모두 검정색으로 덮었는데, 재밌는 건 전면과 달리 후면에서는 모든 글자들까지도 검정색으로 처리해 독특한 느낌을 준다. 이렇게 외관을 모두 검정색으로 통일함으로써 진중하고 차분한 느낌이 더해져 블랙 컬러 차량이라면 의전용으로 사용하기에도 문제 없겠다. 화이트 색상을 선택하면 차량 전반에 화이트 컬러를 입히고 실내외 주요 파츠를 블랙으로 처리하는데, 반전 매력을 좋아한다면 이 쪽도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이런 블랙의 향연은 실내로도 이어진다. 눈에 띄는 건 실내를 무조건 다 검정색으로 덮은 것이 아니라, 빨간색 바느질로 포인트를 살렸는데, 이런 요소들이 스포티한 느낌을 살려줘서 좋다. 각종 버튼이나 다이얼, 레버, 컵홀더 주변 등에는 기존과 동일하게 은색 장식이 더해지는데 이 부분은 기존 제품을 그대로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걸 이해하기에 아쉽거나 하진 않다.
시트는 2-3-3의 3열 구성으로, 2열 가운데 시트는 필요에 따라 접어내려 암레스트로도 쓸 수 있지만, 굳이 필요 없다면 탈착도 가능해 2열을 독립시트 형태로 구성할 수도 있다. 2열 가운데 시트는 탈거했을 경우 트렁크 바닥면에 수납할 수 있도록 고려한 점도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3열은 2열 탑승자들이 조금만 양보하면 성인도 탑승할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고, 6~7명 가량 탑승하는 상황이라면 아이를 앉힐 수 있도록 3열에도 ISOFIX 장치를 마련해놓았다.
화물을 적재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파일럿은 괜찮은 선택이다. 기본 527L로 트렁크 2~3개 정도는 가뿐한데, 3열을 접어내리면 1,373L, 2열까지 접어내리면 2,464L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어 필요에 따라 사용하면 된다. 차박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평평한 공간이 2열까지 완성되니 별다른 작업 없이 매트만 깔아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점도 좋다. 이 외에도 콘솔박스나 도어빈 등 곳곳에 크고 작은 수납함들도 배치되어 있어 실내를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다.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은 대시보드 상단에 TFT 디스플레이를 배치했고, 안드로이드 오토나 애플 카플레이 등 커넥티비티 기능을 제공한다. 오디오는 12개 스피커로 구성된 보스 프리미엄 오디오 시스템이 탑재되어 뛰어난 음질을 경험할 수 있고, 3열 탑승자와의 대화를 위해 캐빈 토크 기능도 적용되어 있다.
엔진은 V6 3.5L 가솔린 자연흡기 엔진이 탑재되어 있다. 친환경 등의 이유로 다운사이징이 대세가 되어버린 요즘 상황에 보기드문 자연흡기 엔진이 반갑기만 하다. 그렇다고 혼다가 친환경에 무관심한 것은 아니다. 하이브리드도 아닌 순수 내연기관 차량이 작지 않은 배기량에도 불구하고 저공해 3종을 획득했으면 그런 걱정은 필요없지 않을까. 그렇다고 성능이 부족하지 않다. 최고출력 289마력/6,100rpm, 최대토크 36.2kg·m/5,000rpm의 성능을 내는데, ‘폭발적’이란 표현까진 어려워도 고속도로 추월 가속처럼 힘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충분한 파워를 보여준다.
물론 3.5L에 달하는 배기량이니 연비도 무시할 수 없는데, 블랙 에디션 모델은 복합 8.3km/L, 도심 7.4km/L, 고속 9.8km/L로 기본형보다 복합 연비와 고속 연비가 살짝 내려갔다. 하지만 실주행에서는 이보다 높은 연비를 확인할 수 있었고 특히 고속도로 연비가 인상적이었는데, 교통 흐름에 맞춰 달리니 12~13km/L까지 나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여러 이유가 있는데, 우선 엔진에 2세대 10단 자동변속기를 조합해 효율을 최대한으로 끌어내도록 했다. 그리고 속도가 느린 시내에서는 한쪽 뱅크의 3개 실린더만을 작동시키는 가변 실린더 제어 시스템이 적용됐고, 신호대기 중에는 스타트 앤 스톱 시스템까지 조합되어 예상했던 것보다 시내에서도 예상보다 높은 연비를 보여줬다.
주행에서는 덩치에 비해 움직임이 민첩하다. 여기에 적용된 사륜구동 시스템인 i-VTM4 AWD 시스템은 신형 파일럿에 맞춰 업그레이드된 것인데, 건조한 노면에선 핸들링을 개선하고 원활한 코너링이 가능하도록 도와주고, 미끄러운 노면에선 안정성을 높여준다고 한다. SUV인 만큼 조금 빠른 속도에서 코너를 돌아보니 좌우로의 쏠림(롤)이 발생하긴 하지만, 돌아나가는 과정만 놓고 보면 매끄럽고 안정적이다. 여기에 노면에 따라 뒷바퀴가 미끄러지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는데, 개별로 작동하는 두 개의 클러치팩이 적용되어 한쪽 뒷바퀴가 그립을 잃어도 나머지 뒷바퀴가 그립을 잡아주기 때문에 노면을 가리지 않고 안정적인 핸들링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다양한 지형에 대응할 수 있도록 지능형 지형 관리 시스템도 탑재되어 있으니 여행 중 다양한 형태의 비포장도로를 만나더라도 모두 대응할 수 있으니 걱정 없이 어디로든 떠날 수 있다.
장시간을 달리다보면 피로해지기 마련이지만, 파일럿은 이런 점이 상대적으로 덜하다.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인데, 우선 주행에서 신경써야 할 부분들을 크게 줄여주는 장비와 기능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ACC)와 차선 유지 보조(LKAS) 기능은 최신 차량이라면 빼놓아선 안될만큼 보편화된 기능이다. 물론 언제나 돌발상황에 대비할 준비를 한 상태여야 하지만, 운전 중 물을 마시거나 하는 정도의 여유를 가질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피로도를 크게 줄여준다. 그리고 헤드업 디스플레이가 있어 시선을 크게 움직이지 않아도 주행에 필요한 정보를 모두 파악할 수 있는 점도 좋다. 여기에 티나지는 않아도 은근하게 피로를 유발하는 요소인 소음도 있는데, 파일럿은 액티브 노이즈 캔슬링(ANC)이 탑재되어 엔진음이나 풍절음 등 탑승공간 외부에서 유입되는 소리를 크게 경감시켜주기 때문에 실내가 상당히 조용한 덕분에 장시간 운전에도 피곤함이 덜하다. 전라남도 영암에 취재가 있어 여기에 맞춰 시승을 진행했는데, 오랜 시간 같은 자세로 앉아있어 허리가 살짝 뻐근했던 것 외에는 크게 피로하지 않았을 만큼 장시간 주행에서도 편안했다.
안전을 중시하는 혼다이니 여러 안전기능들도 갖춰져 있어 장거리는 물론이고 시내 주행에서도 안심이 된다. 운전 중 부주의로 차선을 벗어나게 되면 조향을 직접 제어하여 이탈을 방지하는 동시에 스티어링 휠에 진동을 주고 브레이크까지 작동시키는 도로 이탈 경감 시스템(RDM)이 갖춰져 있다. 브랜드마다 차선 이탈을 경고하는 방식에 차이가 조금씩 있지만, 시각이나 청각 경고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처럼 촉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방식들이 다른 브랜드에도 널리 적용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외에도 전방 충돌 사고 피해를 줄여주는 추돌 경감 시스템, 주차장 등에서 후진 시 경고음이나 자동 제동으로 접근하는 차량과의 충돌을 방지하는 크로스 트래픽 모니터, 사각지대 경고 등 다양한 기능들이 ‘혼다 센싱’이라는 안전 시스템 아래 다양하게 갖춰져 있어 안전기능에 대해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다.
편의사양도 두루 갖추고 있는데, 서라운드 뷰 카메라는 후진 중에도 자동으로 표시되지만, 좁은 골목을 지날 때 부담스럽다면 와이퍼 레버 끝단의 버튼을 눌러 빠르게 호출할 수도 있다. 통풍 시트의 경우 한 차급 아래인 CR-V에서는 빠져 아쉬움이 있었지만 플래그십 SUV인 파일럿엔 탑재됐는데, 이번 시승하는 동안에도 약간 기온이 높은 날이 있어 유용하게 쓸수 있었다. 여름이 유독 무더운 한국 시장을 생각한다면 반드시 있어야 할 기능이다. 그리고 스마트폰 충전을 위한 무선 충전 패드나 USB 충전 포트 등이 갖춰져 있는데,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의 경우 필수적으로 유선 사용을 해야하는 불편함이 있는만큼 향후 업데이트에서는 바뀌길 바란다.
북미 시장에서 혼다의 인기를 견인한 모델이었을 만큼 파일럿은 등장부터 지금까지 소비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4세대 모델로 바뀌면서 업그레이드된 디자인으로 준대형에 걸맞은 모습을 갖추었고, 이번 블랙 에디션을 통해 새로운 매력을 보여주고 있다. 넓은 공간이 주는 편안함과 다양한 첨단 기능들을 통한 안전함까지 두루 갖추고 있어 일상은 물론이고 다양한 곳으로 여행을 자주 떠난다면 뛰어난 내구성에 어떤 곳이든 문제없이 달릴 수 있는 파일럿이 좋은 선택지가 될 것이다.
송지산 기자 song196@ridemag.co.kr